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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이겨레 - 올랜도와 글쓰기에 관하여

by 겨 레 2020. 8. 1.

 

올란도 (1992) dir. 샐리 포터

 

 

 

 

올랜도와 글쓰기에 관하여

 ─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랜도>를 읽고

 

이겨레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랜도>는 이미 틸다 스윈튼 주연의 영화나 여러 논문에서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차례 분석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글에서 올랜도가 글 쓰는 것에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일단은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실은 글쓰기를 싫어하는 게 아닌가? 막상 구상을 마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즐겁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렇지만 그 즐거운 와중에도 나는 내 옆에서 누군가가 내가 쓰는 글을 훔쳐보면서 비웃는 것만 같아 기가 죽는다. 글 한 편을 완성하고 난 후에는 근거 없이 내가 무의식적으로 부도덕한 이야기를 써 놔서 사회 단체에게 맹비난을 받거나 검찰에 기소될지도 모른다는 과대망상에 시달린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들의 문장이 나에게서 나오는 듯하고 존경하는 작가들의 문장이 나의 글과 끊임없이 비교되는 듯하다. 논리와 대담함을 요하는 글을 쓸 때는 내가 혹시라도 어설픈 지식으로 무슨 이 시대의 참된 지식인이라도 된 것마냥 허세를 떠는 건 아닌가 의심한다. 누군가 와서 좋은 글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안심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거듭 반복되다 보니 최근에는 내가 글을 쓸 때면 파랗게 질리고 마는 원인을 곱씹어 보았다. 그 기원을 가장 오래전에 있었던 일들—학교에서 몇 번 상을 받고, 그 일로 주목을 받고, 아빠에게서 글쓰는 법을 배웠던 일—까지 되짚어 볼 수도 있겠지만, 최근 느낀 불안감만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난 뒤부터의 '시대'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까 싶다.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국내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큼직큼직한 사건이 적어도 하나씩은 터졌다. 학교에서는 그동안 내가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남성의 생각, 백인의 생각, 육식 문화 등등이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런 경험이 무척 놀라웠고 희망찬 미래가 다가온 것처럼만 느껴졌다.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었고, 나 역시 이를 감지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준비가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더 많은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내 기대만큼 완벽하게 열린 사람이 되는 것이란 쉽지 않았다. 내게서 결함을 발견해도 그걸 삽시간에 극복하기가 어려울 때도 많았다. 나는 점점 '시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내 글이 소위 ‘중립기어를 박아서’ 비겁해 보이지는 않는지를 걱정했다. 당당해지는 것이 미덕인 듯 보이다가도 내 의견을 밝히는 게 굉장히 위험천만한 일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무언가를 표명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기 딱 좋은 일이었다. 글 속에 티가 날 듯 말 듯 은밀하게 내 속내를 드러낼 때면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내 글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만큼의 나 자신을 확립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시대'를 노련히 살아낼 능력 역시 아직 갖추지 못했다. 내가 감히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없는데도 자꾸만 눈치 없이 뭔가를 끼적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는 글쓰기에 대해 되돌아보게끔 한다.

 

  올랜도는 소년 시절부터 글짓기를 즐겨왔다. 울프는 그가 어릴 적에 지은 작품들은 수려하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이었고 내용 또한 상투적이라고 말한다[1]. 시인 니콜라스 그린이 올랜도의 작품을 조롱한 것만 봐도 올랜도의 초기작이 적잖이 미숙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린이 그의 연금을 받아먹는 예술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괘씸하긴 하다). 이후 올랜도는 환멸을 느끼고 그가 지은 시 '참나무'를 제외한 모든 작품들을 불태워버린다. 이 '참나무'라는 시는 이후에도 올랜도가 영감을 얻을 때마다 품속에서 꺼내 조금씩 살을 붙여가며 20세기에 이르러 출판된다. 올랜도가 터키 대사를 지내고, 여성으로 변해 '여성'의 삶을 경험하고, 한때 원망했던 사샤를 이해하게 되며, 새로운 사랑을 경험하는 동안 올랜도의 글은 더욱 그다운 글이 되었을 것이다.

  올랜도는 연인인 쉘머딘이 다시 항해를 나간 뒤 글쓰기에 몰입한다. 이때 올랜도의 모습을 울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녀는 그 시대정신에 교묘하게 경의를 표시해서, 다시 말해, 반지를 끼고, 황야에서 한 남자를 발견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풍자가나 냉소주의자나 심리학자가 되지 않고—이런 것들은 금세 들켰을 것이다—시대정신의 검사를 무사히 통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당연한 일이지만,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작가와 시대정신 사이의 상호 교섭은 지극히 섬세한 것이며, 작품의 운명은 오로지 둘 사이의 은밀한 협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올랜도는 협정을 잘 처리했기 때문에, 지극히 행복한 상황에 있었다. 그녀는 자기 시대와 싸울 필요도 없고, 그것에 굴복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바로 그 시대에 속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고로 이제 그녀는 글을 쓸 수 있었고, 실제로 글을 썼다. 그녀는 쓰고, 쓰고, 또 썼다.

 

─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박희진 역(2019), 솔, 234쪽.

 

 

  이 때를 기점으로 올랜도는 자신을 그동안 혼란하게 했던 시대에 비로소 녹아든 것처럼 보인다. 그전까지 그의 일생은 방황의 연속이지만, 글쓰기에의 몰입을 경험한 뒤로 올랜도의 행동은 훨씬 여유 넘치고 멋져 보인다. 그는 여성으로 살면서도 당대의 여성답지 않은 당당함을 유지하고,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결코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다. 올랜도는 여자로 변했다고 하여 당대 여성으로서의 기준에 자신을 밀어넣으려 하는 대신 그 자신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산다. 한 인물이 일생 동안 겪는 변화를 주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자기고뇌와 비참한 자괴감 따위는 <올랜도>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1920년대에 이르러 니콜라스 그린과 재회한 올랜도는 과거 혹평받았던 자신의 시에 대한 칭송을 듣고 심지어는 글을 출판할 기회까지 얻는다. 16세기에는 키케로를 칭송하고 잉글랜드의 문학을 맹비난하던 닉 그린이 20세기에 와서는 셰익스피어를 칭송하고 20세기 문학을 비난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는 단순히 늘 고전만을 찬양하는 평론가들을 풍자하려는 의도로 등장한 인물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와는 별개로 그린이 300여년 전 조롱했던 올랜도의 시를 후에 아름답다며 칭송한 것은 그동안 올랜도가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사는 시대를 유연히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울프는 올랜도의 전기를 통해 우리가 ‘시대’ 앞에서 정의의 투사처럼 살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대를 신처럼 모실 필요 또한 없다는 사실 역시 일깨운다. 수많은 소설들이 소위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심오한 자아성찰이 진보의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하지만, 너무 많은 생각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오히려 절망감으로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정신과 의사들이 괜히 불안증 환자에게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활동을 줄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올랜도처럼 부지런히 제 인생을 살면서 자신을 특정 기준에 맞추려 들지 않는 것이 어쩌면 끊임없이 꿈틀대는 이 시대를 무사히 지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시대의 기준에 맞춰 가혹하게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우리의 시대는 끝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기에 우리가 모든 흐름을 완벽하게 맞춰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 모든 흐름에 완벽히 맞추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언급되었듯 시대정신과 ‘교섭’할 줄 알아야 한다. 올랜도는 여성의 독립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게 복종하는 대신 남성과 여성 간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신이 가장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향을 택했다[2]. 그리고 시대가 그에게서 기대하는 것들에 대해 부분적으로 (여성일 때는 치렁치렁한 여성복을 입고, 남편을 얻는 등) 부응해 주면서도 전통적 성 역할에 완전히 얽매이지 않는 예술가의 삶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수용하되 자기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이에 굴종하지 않는다.

 

  올랜도가 자신의 글을 성공적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영리하게 시대를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을 하루아침에 떨쳐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또다시 글쓰기에 앞서 머릿속이 하얘질 때면 올랜도를 떠올려야겠다. 올랜도가 경험한 순간이 내게도 어서 찾아왔으면 좋겠다.

 


[1]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박희진 역(2019), 솔, 17쪽.

[2] 소설은 올랜도가 여자로 변한 뒤로 사회적 제약이 늘어나자 때로는 남장을 하고 올랜도 부인의 사촌을 자처하면서 다니기도 했다고 밝힌다.

 

 


 

이겨레 | 고등학교 2학년 때 소설가 이상의 팬이 되면서 <월간 권태>를 처음으로 구상했습니다. 덕업일치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하면서도 그걸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세상 뛰어 넘기'를 2010년부터 운영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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