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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운 - 그 날의 지문은 그 날의 지문은 전여운 핸드폰의 지문 인식 기능이 잘 통하지 않는다. 요리조리 손가락을 돌리면서 양쪽 엄지의 지문을 각 두 번씩이나 등록해 두었지만 여전히 먹히지 않는다. 결국 지문 인식을 통한 잠금 해제는 30초 뒤에 다시 가능하다는 암울한 메시지가 뜨고, 어쩔 수 없이 패턴을 입력해 화면을 켠다. 사람의 지문은 그 자체로 아주 완벽한 인증 시스템이다. 지문은 사람마다 고유하고 ‘이론적으로는’ 절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그 지문을 손에 넣는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찾아낼 수 있다. 주민등록증을 처음 만들던 그해 겨울에 난 수험생의 음울함이 덜 가신 밋밋한 낯으로 동사무소에 가서 지문을 눌러 찍었다. 그날 보았던, 인주를 묻혀 찍은 지문은 마치 짓눌린 포도 같았다. 그 짓눌린 포.. 2020. 7. 8.
이겨레-거짓말 탐지기 거짓말 탐지기 이겨레 그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연히 매일이 불안했고 그만큼 매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기찼다. 그들은 매일 머리채라도 잡혔다 풀려난 것처럼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얼굴은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채 매일 밤늦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모두 스트레스성 장염을 자주 앓았던 탓에, 살이 쪄서 걱정이라는 다른 고3들과는 다르게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어른들은 마치 성전에 출전할 기사들을 보는 양 그들을 대접하고 볼때마다 안쓰러워 혀를 찼다. 한번은 그들 중 한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그를 보더니 “학생, 여기 앉아요. 고생도 많지!” 하면서 자리를 양보해줄 정도였다. 그는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릴 예정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나이 지긋한 할머니의 자리에 .. 2020. 6. 30.
김수빈 - 세탁기에 관한 원초적 분노 세탁기에 관한 원초적 분노 김수빈 제기랄. 밤 10시에 나체 차림, 팬티 한 장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물을 잔뜩 빨아들여 질퍽한 빨래 더미를 바닥에 쌓아두고, 하나씩 건져 올려 손수 물을 짜내는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나도 내가 목격하게 될 줄 몰랐다. 이 손 바닥만한 원룸 자취방에 물은 흥건하고, 화장실에 있는 전면 거울에서 내 벌거벗은 몸을 마주하며, 세탁기를 나둔 채 하나하나 물을 짜내는 초라한 몰골이 내 꼴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 망할 세탁기. 이 망할 701호. 이 망할 코딱지만 한 원룸. 망할 자취. 망할 서울. 내 계획은 완벽했다. 53분의 긴 세탁과정이 끝나면 건조대에 차곡차곡 여백 없이 빨래를 걸어놓고, 내일 눈 뜨면 뽀송하게 말라 있을 것을 기대하며 창문도 .. 2020. 6. 30.
김수빈 - 소화의 과정 소화의 과정 김수빈 1. 지독한 악몽이었다. 잊어버릴 때 즈음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찾아왔다가, 그렇게 시달리고 나고 깨면, 다시 그 꿈을 꿀 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분 나쁜 미묘함에 잠시 머리를 짚고 있다 보면, 곧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에서 알람 소리가 울린다.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끄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고, 곧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악몽의 후유증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이 기분 나쁜 꿈보다 현실이 더 악질일 수는 있겠지만. 씻으러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휴대폰 화면을 한 번 더 본다. 3월 29일, 아침 6시 반이다. 딱히 기억나는 일정이라곤 없는, 특별할 거 없는 하루, 늘 그랬던 것처럼. 왠지 모르게 몸이 시원찮다. 기지개를 쭉 피며 방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 그 찰나, 누.. 2020.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