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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예지11

전여운 - 그 가정의 방문 (상) 그 가정의 방문 전여운 0. 염수진의 실종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을지로였다. 그 날 나는 데면데면한 경제 3반동기들과 함께 졸업 기념 모임이었나, 취직 기념 모임이었나, 때문에 을지로의 한 치킨집에 있었다. 연구실에서 석사논문과 씨름하던 내가 그 자리에 끼게 된 것은 같은 연구실에서 일하는 반장 때문이었다. 꼭 오라는 반장의 손에 이끌려 왔지만, 동기들과 별다른 추억도 없고, 졸업하자마자 학교에서 도망치듯 타대 대학원에 진학한 나로서는 미적지근한 모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의 졸업 얘기, 취업 준비 얘기, 또 직장생활 얘기는 김빠진 맥주처럼 미지근하고 끝 맛이 썼다. 하지만, 봄아, 너는 석사 하고는 뭘 하고 싶어? 라고 질문이 돌아왔을 때에 난 해사한 얼굴로 박사 학위까지 따고 싶다고 대답했다... 2020. 7. 15.
전여운 - 보류됨의 즐거움에 대해서 보류됨의 즐거움에 대해서 전여운 무언가를 보류하는 것을 좋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난 성질이 급한 아이였고 빨리 답을 받기를 원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알 때 까지 문제에 매달렸고, 온갖 책을 찾아가면서 답을 찾았다. 다음에 해야지, 라는 말은 거의 한 적이 없었다. 시작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끝을 좋아하고, 문제를 좋아하는 만큼 답을 좋아했던 것 같다. 결론, 정해져 있는 것, 결말, 그런 것들에 매달리고, 궁금해 하고, 확실히 하고자 하는, 그런 것이 삶의 크고 작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 네게 이 보류되어 있는 시간이 썩 좋지 않니, 하고 건넸던 말은 거짓말이었다. 넌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그 보류되어 있는 시간은 정체모를 널 두고 절절매던 시간.. 2020. 7. 8.
전여운 - 그 날의 지문은 그 날의 지문은 전여운 핸드폰의 지문 인식 기능이 잘 통하지 않는다. 요리조리 손가락을 돌리면서 양쪽 엄지의 지문을 각 두 번씩이나 등록해 두었지만 여전히 먹히지 않는다. 결국 지문 인식을 통한 잠금 해제는 30초 뒤에 다시 가능하다는 암울한 메시지가 뜨고, 어쩔 수 없이 패턴을 입력해 화면을 켠다. 사람의 지문은 그 자체로 아주 완벽한 인증 시스템이다. 지문은 사람마다 고유하고 ‘이론적으로는’ 절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그 지문을 손에 넣는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찾아낼 수 있다. 주민등록증을 처음 만들던 그해 겨울에 난 수험생의 음울함이 덜 가신 밋밋한 낯으로 동사무소에 가서 지문을 눌러 찍었다. 그날 보았던, 인주를 묻혀 찍은 지문은 마치 짓눌린 포도 같았다. 그 짓눌린 포.. 2020. 7. 8.
이겨레-거짓말 탐지기 거짓말 탐지기 이겨레 그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연히 매일이 불안했고 그만큼 매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기찼다. 그들은 매일 머리채라도 잡혔다 풀려난 것처럼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얼굴은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채 매일 밤늦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모두 스트레스성 장염을 자주 앓았던 탓에, 살이 쪄서 걱정이라는 다른 고3들과는 다르게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어른들은 마치 성전에 출전할 기사들을 보는 양 그들을 대접하고 볼때마다 안쓰러워 혀를 찼다. 한번은 그들 중 한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그를 보더니 “학생, 여기 앉아요. 고생도 많지!” 하면서 자리를 양보해줄 정도였다. 그는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릴 예정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나이 지긋한 할머니의 자리에 .. 2020.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