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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

이겨레-거짓말 탐지기 거짓말 탐지기 이겨레 그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연히 매일이 불안했고 그만큼 매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기찼다. 그들은 매일 머리채라도 잡혔다 풀려난 것처럼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얼굴은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채 매일 밤늦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모두 스트레스성 장염을 자주 앓았던 탓에, 살이 쪄서 걱정이라는 다른 고3들과는 다르게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어른들은 마치 성전에 출전할 기사들을 보는 양 그들을 대접하고 볼때마다 안쓰러워 혀를 찼다. 한번은 그들 중 한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그를 보더니 “학생, 여기 앉아요. 고생도 많지!” 하면서 자리를 양보해줄 정도였다. 그는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릴 예정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나이 지긋한 할머니의 자리에 .. 2020. 6. 30.
김수빈 - 세탁기에 관한 원초적 분노 세탁기에 관한 원초적 분노 김수빈 제기랄. 밤 10시에 나체 차림, 팬티 한 장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물을 잔뜩 빨아들여 질퍽한 빨래 더미를 바닥에 쌓아두고, 하나씩 건져 올려 손수 물을 짜내는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나도 내가 목격하게 될 줄 몰랐다. 이 손 바닥만한 원룸 자취방에 물은 흥건하고, 화장실에 있는 전면 거울에서 내 벌거벗은 몸을 마주하며, 세탁기를 나둔 채 하나하나 물을 짜내는 초라한 몰골이 내 꼴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 망할 세탁기. 이 망할 701호. 이 망할 코딱지만 한 원룸. 망할 자취. 망할 서울. 내 계획은 완벽했다. 53분의 긴 세탁과정이 끝나면 건조대에 차곡차곡 여백 없이 빨래를 걸어놓고, 내일 눈 뜨면 뽀송하게 말라 있을 것을 기대하며 창문도 .. 2020. 6. 30.
김수빈 - 소화의 과정 소화의 과정 김수빈 1. 지독한 악몽이었다. 잊어버릴 때 즈음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찾아왔다가, 그렇게 시달리고 나고 깨면, 다시 그 꿈을 꿀 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분 나쁜 미묘함에 잠시 머리를 짚고 있다 보면, 곧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에서 알람 소리가 울린다.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끄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고, 곧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악몽의 후유증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이 기분 나쁜 꿈보다 현실이 더 악질일 수는 있겠지만. 씻으러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휴대폰 화면을 한 번 더 본다. 3월 29일, 아침 6시 반이다. 딱히 기억나는 일정이라곤 없는, 특별할 거 없는 하루, 늘 그랬던 것처럼. 왠지 모르게 몸이 시원찮다. 기지개를 쭉 피며 방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 그 찰나, 누.. 2020. 5. 29.
이겨레 - 상어의 작은 세계 상어의 작은 세계 이겨레 이재민의 가장 큰 불행은 본인의 불행을 떳떳하게 여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문화가 있는 날인 마지막 주 수요일이었다. 때마침 재민은 공강이라 학교에 갈 필요가 없었고, 그의 친구 셋도 시간이 맞았다. 재민의 친구들은 그에게 만나서 아쿠아리움에 가자고 연락을 했다. 친구들에게 연락이 오기 전까지도 재민은 요를 개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신이 정말로 불행한 게 맞는 것인지를 곱씹는 중이었다. 재민은 잠깐 망설이다가 곧 외출할 채비를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재민은 외출하기를 꺼렸는데, 집을 나서기만 하면 문밖에서 재민을 기다리던 근심이 득달같이 그의 어깨 위를 올라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쿠아리움에 가자는 말을 들은 순간 재민은 열대어들이 몹시 보고 싶어져 친구들을 뿌.. 2020. 5. 19.